법치주의 흔드는 포퓰리즘 정책 - 제성호
	2005-08-23
법치주의 흔드는 포퓰리즘 정책 광복 60주년을 맞은 대한민국의 자화상을 바라보면 너무도 우울하다. 국가의 기본 틀인 헌법 경시,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의 기승과 법치주의의 외면, 민족공조란 구호의 난무, 대한민국의 정체성 혼란 등…. 정부는 대한민국을 대내외적으로 대표하며, 국민에 의해 선출된 대통령은 헌법을 수호할 책무를 진다. 그러나 최근 노무현 대통령이 소급입법에 의한 공소시효 배제를 언급한 대목에 이르러선 헌법 수호 의무를 저버리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아무리 정의라는 명분을 내세운 과거 청산일지라도 죄형법정주의와 형벌불소급 원칙을 인권의 대장전으로 천명한 대한민국의 기본(헌법 제13조1항)을 뒤흔들면서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권력남용의 범죄가 밉더라도 ‘무한 처벌’의 비인도성과 국가형벌권의 남용은 안 된다. 대통령은 이튿날 자신의 발언을 사실상 뒤집었지만, 이 같이 중대한 사안에 잠시라도 정치적 혼선을 빚은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노 대통령의 지난 8·15 경축사는 자유 대한민국의 건국과 이후 온갖 대내외적 도전(공산주의 위협 등)으로부터 국가의 생존을 지키기 위한 피나는 과정을 다루지도 않았다. 그 대신 대한민국의 오늘이 있게 한 과정에서 발생한 불행한 과거사 청산만을 강조했다. 평소 노 대통령의 지론인, “지난 시기 불의의 세력이 득세했다”는 역사관이 반영됐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민주와 반민주, 친일과 반일의 이분법적 잣대가 동원됐다. 중간지대를 인정치 않는 흑백론은 국론분열을 확대 재생산할지언정, 미래 지향의 국민통합과는 거리가 멀다. 8·15 광복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있었기에 오늘의 노무현정부가 있는 것이다. 정부의 교체에도 불구하고 국가로서의 동일성(identity)이 있는 한 국가 계속성(continuity)이 인정된다. 따라서 현 시점에서 오늘을 있게 한 뿌리를 생각지 않고, 어제의 우리를 부정 일변도로 보려는 자세는 일종의 오만으로 느껴진다. 지난 60년의 역사는 신생 한국의 비약적 발전과 계속적인 지양(止揚)의 과정이라고 봐야 옳다. 지난 광복절에 상암 월드컵경기장에서는 “대~한민국”도 태극기도 없었다. 그러한 노래와 율동은 분열주의로 취급됐다. 국가보다 민족을 앞세우는 사상의 물결과 한반도 깃발만이 넘실거렸다. 하지만 그것은 엄연히 국가보안법 등 실정법을 무력화시키는 행사였다. 관습헌법으로 인정되는 국가 상징물에 대한 모독이자 국가 정체성의 혼란 그 자체이기도 했다. 민족우선론도 통일 노력도 좋지만, 어디까지나 국기(國基)를 선언한 헌법의 규정과 정신, 즉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자유민주주의에 충실해야 한다. 동작동 국립묘지에서의 북한 대표단의 참배 대상은 대한민국 건국과 수성(守成)의 인물들이 아니었다. 독립운동을 한 극히 일부의 사람들뿐이었다. 이는 상호 실체 인정의 정신에 부합하는 것이 아닐 뿐더러, 북한이 일으킨 전쟁의 희생자라 할 수 있는 6·25 전몰 장병들과 유가족들에 대한 예우가 아니었다. 환갑을 맞은 대한민국은 이제 좀더 성숙하고 안정된 나라가 돼야 한다. 21세기 선진 한국은 한 마디로 대한민국의 정체성 토대 위에서 ‘법의 지배’가 실현되는 나라일 것이다. 이를 위해선 사회적 약속인 법을 존중해야 하며, 포퓰리즘이나 사회적 공익을 앞세워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해선 안 된다. 더불어 인권의 보편적 가치에 입각해 자유민주 통일을 실현하는 게 헌법의 명령이다. 작금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하는 X파일의 처리나 민족의 숙원인 평화적 통일 등 모든 현안은 법치주의의 기본정신에 따라 추진해야 한다. 포퓰리즘에 따른 위헌적 법률의 제정은 입법권의 남용에 지나지 않으며, 헌법을 무시하는 정책은 결코 정당성과 실천력을 가질 수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제성호 (중앙대 법학 교수 / 시민회의 운영위원) 출처 - 문화일보 2005. 8. 23 포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