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사, 청산만이 능사 아니다 - 김일영
	2005-08-04
과거사, 청산만이 능사 아니다 광복 60주년이 다가오면서 과거사 청산의 목소리가 다시 커지고 있다. 1일에는 일부 인사가 모여 "분단.예속.편견과 갈등으로 점철된 지난 60년의 역사를 극복하고 제2의 광복"을 선언하는 행사를 했다고 한다. 과거사 청산은 노무현 정부가 초기부터 공을 들여온 작업 중 하나다. 그런데 우리의 과거사가 과연 그렇게 일방적 청산의 대상일 뿐인가. 지난 60년 동안 한국은 국가 건설-산업화-민주화를 거쳐 발전해 왔다. 건국.부국.민주화라는 과제는 동시에 추구될 수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따라서 이승만.박정희, 그리고 양김(김영삼.김대중)은 각각 하나의 과제를 맡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이제 우리는 산업화와 민주화를 병행하면서 산업구조를 정보사회에 맞게 고도화하고 민주주의를 심화시키는 선진화의 단계에 있다. 선진화는 건국의 기초 위에서 산업화와 민주화의 성과를 변증법적으로 종합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 경우 종합은 제거.보존.고양(高揚)이란 세 가지 의미가 중첩된 '지양(止揚.aufheben)'을 뜻한다. 그런데 근자에 진행 중인 과거사 청산 작업은 지양이란 말에 포함된 세 의미 중 제거에만 편중된 것 같아 안타깝다. 일이 이렇게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게 만든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집권세력의 잘못된 역사의식에 있다. 그들은 민주화 세력이 무결점과 무오류라는 신화 위에서 건국과 산업화 세력을 단죄하는 것을 과거사 청산 작업의 전부로 오해하고 있다. 이런 식의 역사관은 민주화 세력이 자신들과 건국 및 산업화 세력 사이의 차이점만 보고 공통점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 데서 연유한다. 건국 및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 사이에 차이점이 큰 것은 사실이다. 건국 세력은 선건국 후통일을, 산업화 세력은 선성장 후통일을 주장했다. 두 세력은 모두 2단계 통일론을 내세운 것이다. 이에 반해 민주화 세력은 통일 없는 건국은 무의미하고, 통일 없는 성장은 파행적 결과를 낳을 뿐이라고 하면서 통일을 앞세웠다. 산업화 세력이 선성장 후분배를 추구한 반면 민주화 세력은 성장과 분배의 균형적 추구를 주장했다. 이러한 두 세력 사이의 차이점에 대해서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차이점 못지 않게 공통점도 적지 않다. 크게 두 가지로 정리될 수 있는데 하나는 국가 의존적이라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민족 우선 내지는 집단주의적이라는 점이다. 산업화 세력이 국가 주도형 성장모델을 추구했고, 그 점에서 그들이 국가 의존적이라는 점은 익히 알려져 있다. 그러나 민주화 세력이 추구한 분배모델 역시 국가 의존적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별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당시 대립한 두 세력은 성장과 분배라는 상이한 목표를 모두 국가에 의존해 달성하려 했으며, 이 점에서 국가 개입의 축소와 보다 시장 주도적인 경제의 수립을 목표로 삼는 오늘의 관점에서는 두 세력 사이의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이 강조될 필요가 있다. 산업화 세력 못지 않게 민주화 세력도 민족이나 집단을 앞세웠다. 박정희 정부가 얼마나 국가 우선 내지 민족 우선주의를 내세웠는가는 어려서 외운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로 시작하는 국민교육헌장의 내용을 상기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박정희 정부와 싸웠던 민주화 세력 역시 내용은 좀 달랐지만 민족 우선주의를 주장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이 세력의 상징적 인물인 장준하는 "통일이라는 민족적 목표를 위해서라면 개인의 희생을 감내해야 한다"는 생각을 거침없이 피력하고 있다. 자유로운 개성의 발현을 새로운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아야 하는 현시점에서 보면 산업화 세력 못지 않게 민주화 세력의 집단주의도 문제시될 수 있다. 과거사는 한 세력이 다른 세력을 단죄한다고 청산되는 게 아니다. 동시대를 호흡해온 그들에게는 차이뿐 아니라 공유점도 적지 않으며, 그 모든 것은 제거.보존.고양의 동시적 대상이지 일면적으로 제거의 대상은 아니다. 과거를 제거나 청산의 대상으로만 생각해서는 선진화의 길은 요원하다. 김일영 (성균관대 교수.정치학 / 시민회의 운영위원) 출처 - 중앙일보 2005. 8. 4 시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