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룡의 '징비록'을 다시 읽는다 - 남주홍
	2005-04-22
유성룡의 '징비록'을 다시 읽는다 한반도 문제를 오랫동안 연구해온 국제사회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지금 서로 상반된 두 가지 시나리오가 회자되고 있다. 하나는 최선의 경우로서, 6자회담을 통해 북핵 문제가 풀리고 북한이 중국 혹은 베트남 식 모델로 변화를 추구하며 미·북 관계도 정상화되어 결국 이로 인해 가칭 유럽식(OSCE) ‘다자간 평화협의체’가 구성되는 시나리오다. 이것이 현실화된다면 한국은 그야말로 ‘동북아균형자’로서 역할을 자임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그 반대의 경우이다. 북핵 무장으로 인해 결국 북한과 미국이 충돌하고 이 와중에 한국이 대북 제재를 완강히 반대하는 바람에 한·미 공조체제가 사실상 와해된다. 미·일 주도로 유엔의 대북 제재가 실시되면서 중국이 예의 ‘화평굴기(和平堀起·평화적 부상)’ 논리로 미국과 정면대결을 피해 방관적 태도를 취하자 북한 내부에 혼란이 발생, 결국 급변 사태로까지 이어진다는 내용이다. 이렇게 되면 남북 간에도 우발 사태가 초래될 수 있다. 이 시나리오는 주로 미국과 일본 그리고 영국 등 서방측 정보 및 연구기관이 제시하고 있다. 반면, 앞의 시나리오는 지금 한국 정부가 일관되게 그리고 있는 그림이다. 어떠한 경우든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여기서 중간부분, 즉 회색지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사안의 성격이 단순히 북핵 문제 그 자체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핵확산금지조약(NPT)과 동북아시아 역학관계의 향방, 그리고 나아가 테러와의 전쟁의 궁극적 목표까지 걸려 있는, 그야말로 국제 안보질서 전체에 영향을 미치게 돼 있기 때문에 한반도 핵위기를 ‘절충’할 여지는 그만큼 없다고 보는 것이다. 북한이 최근 핵무장선언에 이어 영변원자로에서 폐연료봉을 빼 재처리 작업을 시도하는 것이나, 미국이 6자회담이 안 되면 유엔 안보리에 회부하겠다고 재천명한 것은 바로 이 전략 현실을 나름대로 분명히 읽고 내린 선택이다. 따라서 이대로 가면 어떠한 형태든 한반도 현상 유지(status quo)에 근본적 변화는 불가피해진다. 6자회담이 잘 되어 휴전체제가 평화체제로 바뀌든 아니면 정반대로 그것이 깨져 급격히 비상사태로 치닫게 되든 올해 하반기가 최대의 고비이다. 우리는 이 흐름을 잘 읽어야 한다. 지금 우리를 제외한 6자회담 5개 당사국은 지극히 보수적 안보전략으로 위기 관리에 임하고 있고, 특히 미국과 북한의 태도는 극보수 성향마저 보이고 있다. 한마디로 우리는 보수적 성격의 위기에 진보적 논리로만 대응하고 있는 형국이다. 우리가 오직 이러한 형세를 정확히 읽고 판단할 때 ‘중재자’든 ‘균형자’든 역할을 자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지 않고 지금처럼 막연히 낙관적인 통일관이나 이분법적인 동맹관, 그리고 탁상공론식 외교 수사법(rhetorics)으로만 일관하면 스스로 위험한 고립을 자초할 수 있다. 무릇, 안보 분야는 다른 분야와 달리 먼저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고 위기관리력을 배양하여 이를 최선의 경우로 이끌어 가는 과정을 일컫는다. 평화를 원하거든 먼저 전쟁에 대비하란 말은 바로 이를 뜻한다. 임진왜란 당시 도체찰사요 영의정이었던 서애 유성룡은 그의 임진왜란 회고록인 ‘징비록(懲毖錄)’에서 후손들이 다시는 이러한 참화를 입지 않으려면 다음의 세 가지를 꼭 명심하라고 했다. 첫째는 한사람의 정세 오판으로 천하의 큰일을 그르침을 경계하는 것이고, 둘째는 지도자가 군사(안보)를 다룰 줄 모르면 나라를 적에게 넘겨준 것과 같다는 점이며, 셋째는 유사시 믿을 만한 후원국(동맹국)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교훈적 경구는 구한말과 6·25 직전 우리 상황에 대입, 적용해도 틀림이 없는 지적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이 정부의 공(功)이 있다면 안보 문제의 중요성을 역설적으로 다시 일깨워준 점이다. 국가와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는 충언을 이론(異論)으로 받지는 못할망정 ‘친미’나 ‘냉전적’ 사고로만 치부하려는 작금의 감상적 안보 포퓰리즘은 우리를 절망케 한다. ‘신조선책략’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다. 남주홍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장 / 시민회의 회원) 출처 - 문화일보 2005. 4. 22 포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