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소수' 친미가 그토록 골치거린가 - 정진영
	2005-04-21
'극소수' 친미가 그토록 골치거린가 말로써 하는 싸움이 몸으로 하는 싸움보다 낫다고 흔히 말한다. 특히 정치의 영역에서는 그러하다. 그러나 가시돋친 말 한마디가 사람 사이를 얼마나 갈라놓을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면 이 말이 반드시 맞는 것 같지는 않다. 요즘 우리 정치판이 마치 이런 형국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터키 방문시 그곳 교민과의 간담회 자리에서 “미국 사람보다 더 친미(親美)적인 한국 사람들이 문제”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국내의 여러 언론 매체들이 대통령이 또 국민을 편가르기 한다고 비난했다. 이에 대해 조기숙 홍보수석은 “과연 편가르기 하는 사람들이 누구냐”고 반문하면서 언론의 보도 태도를 힐난했다. 그리고 그는 문제의 친미적 한국인으로 ‘미국에서 공부해 영어가 유창한 일부 인사들’이라고 설명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조 수석은 한·미동맹 균열 우려를 지적하는 사람들에 대해 ‘과거 북한의 위협을 갖고 안보 장사’를 하듯이 이제는 ‘한·미동맹을 흔들어서 국민의 불안감을 조성해 새로운 안보 장사’를 하려 한다고 강도 높게 비난했다. 어디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차례로 따져 보자. 어떤 말이 편가르기 하는 것인지 아닌지는 말한 사람의 의도, 말을 한 맥락, 듣는 사람의 태도 등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의도와 태도가 매우 주관적인 요소라는 점을 고려하면 맥락이 그래도 객관적인 판단 기준이 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오늘날 한국의 상황에서 어떤 대통령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가정해 보자. “미국 사람들보다도 자국 사람들을 더 미워하는 한국인들이 있어서 문제야.” 또는 “미국보다도 북한을 더 좋아하는 사람들이 골칫거리야.” 이 말들이 편가르기 하는 것으로 들린다면 대통령의 터키 발언도 편가르기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조 수석은 친미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의 범위를 매우 좁혀서 제시하고 있다. 미국에서 공부한 사람도 국민 전체 중 매우 적은 수인데, 그중에는 영어를 잘 못하는 사람들도 꽤 많다. 그리고 그러한 범주에 속하는 사람들의 오직 일부가 친미주의자라고 하니, 이들이 과연 수적으로 얼마나 되겠는가. 그런데 이러한 극소수의 친미주의자들이 대통령의 정책 수행에 그렇게도 골칫거리인가. 대통령의 말을 수습하려는 참모들의 고뇌가 엿보인다. 최근의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우리 국민의 61%는 한·미관계가 현 수준으로 유지되거나 강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70%는 지난 2년간 한·미관계가 악화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이들이 모두 잘못 생각하고 있다고 여겨진다면 남을 탓하기 전에 자신의 생각부터 재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안보 장사 발언은 어떠한가. 한국에 있어서 안보문제는 지구상의 그 어느 나라에 못지않게 심각한 문제이다. 국민개병제, 막대한 국방예산 지출에 더하여 불평등을 감수하면서까지 한·미동맹을 유지해 오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과거 한국 정치에 있어서 군의 정치적 영향력이 컸던 이유도 부분적으로 여기서 발견된다. 군사정부가 안보 불안을 정치적 목적으로 사용했던 것은 분명히 잘못한 일이다. 그러나 이 사실이 곧 국가 안보에 대한 우려를 하지 않아도 된다거나 하지 말아야 된다는 주장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지금 우리는 북한 핵문제, 동북아 질서의 불안정 등으로 매우 어려운 안보 상황에 놓여 있다. 북한의 핵무기 개발은 남북한 간의 군사력 균형을 근본적으로 무너뜨리는 심각한 사건이다. 이는 우리가 지난 40여년간 경제 발전과 국방 투자를 통하여 달성한 성과를 물거품으로 만들 위험이 있다. 동북아 강대국 질서의 재편도 우리에게는 큰 위협 요소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가 안보를 우려하는 것은 매우 당연하다. 국가 안보에 관한 한 최선의 것을 추구하는 것보다 최악의 것을 피하는 것이 우선이다. 굳이 비교하자면 안보 불안을 파는 안보 장사가 안보 불감을 파는 안보 장사보다는 그래도 낫다. 정진영 (경희대 국제학부 교수 / 시민회의 운영위원) 출처 - 조선일보 2005. 4. 21 시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