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 균형자론'의 혼선 - 정진영
	2005-04-13
'동북아 균형자론'의 혼선 우리나라가 동북아 균형자 역할을 하겠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외교 노선 천명에 대한 논란이 정치권과 학계에서 뜨겁게 일어나고 있다. 논란의 핵심은 두 가지이다. 우선 개념 문제이다. 즉 ‘동북아 균형자론’이 무슨 뜻이냐에 관한 논란이다. 다음으로 국익 논란이다. 이러한 외교 노선이 과연 대한민국의 국가 이익, 특히 안보를 증진시킬 것인가 손상시킬 것인가를 둘러싼 논란이다. 개념 논란의 일차적인 원인은 대통령과 그 참모들이 국가의 핵심 대외정책 노선을 천명하면서 불분명하고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방법으로 특정한 개념을 사용한 데 있다. 국제관계에서 흔히 사용되는 ‘균형자’라는 개념은 세력균형이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 힘의 불균형이 발생하면 전쟁이 일어날 위험이 있기 때문에 힘이 약한 쪽을 지원하는 것이 국제관계 안정에 도움이 된다는 이론이다. 그런데 어떤 국가가 균형자 역할을 하려면 국제적 세력판도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우선 노 대통령은 이러한 의미로 균형자론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학계와 정치권의 논란을 촉발한 계기가 된 3월22일 육군 제3사관학교 졸업식 연설에서 노 대통령은 “앞으로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동북아의 세력판도는 달라질 것”이라고 주장하고 “이제 우리는 한반도뿐 아니라 동북아시아 평화와 번영을 위한 균형자 역할을 해나갈 것”이라고 천명했다. 대통령이 세력판도 변화를 언급하면서 동북아 균형자론을 제기한 맥락을 볼 때 균형자 개념은 국제관계의 통상적인 용법에 따라 사용하고 있는 것임이 틀림없다. 동북아 균형자 개념에 대한 대통령의 이러한 이해 방식은 주목을 덜 받기는 했지만 올들어 행한 일련의 연설들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취임 2주년 국정연설에서 노 대통령은 “우리 군대는 동북아시아 균형자로서 동북아 지역 평화를 굳건히 지켜낼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3·1절 기념사에서 “지금 우리는 100년 전과 달리 스스로를 지킬 만한 넉넉한 힘을 가지고 있으며, 동북아 균형자 역할을 할 수 있는 국방력을 키워가고 있다”고 말했다. 또 3월8일 공군사관학교 졸업식에서는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에 반대하면서 우리 군이 “동북아시아의 세력균형자로서 이 지역의 평화를 굳건히 지켜낼 것”이라고 말했다. 대통령의 균형자론은 세력균형론에 입각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따라서 대통령의 동북아 균형자론이 논란을 불러일으킨 것은 당연하다. 우선 세계적 수준의 강대국들로 구성된 동북아시아 역학관계에서 한국이 균형자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국력, 특히 군사력을 갖고 있는가에 의문이 있다. 게다가 동북아 균형자론이 미국과의 동맹관계 결별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처는 균형자 역할을 위한 국력은 군사력만이 아니라 경제력, 주변국과의 우호협력관계, 평화주의 등 ‘종합적 국가 역량’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또 문정인 동북아시대위원장은 ‘힘의 균형’이 아니라 ‘인식과 가치의 균형과 조정’을 의미하는 것으로 균형을 해석해야 한다고 설명하고, 한국의 동북아 균형자론은 “한미동맹과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보완관계에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그는 미국이 중국 포위정책을 취하거나 대북 강경책을 취할 경우 ‘동북아 균형자론과 한미동맹은 심각한 모순관계’에 빠질 수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국익 차원에서 동북아 균형자론의 가능성은 현실과 이에 대한 주변국가들의 반응에 따라 좌우된다. 동북아 국가들이 패권경쟁으로 나아가는 가운데 한국이 이를 저지할 역량이 있다면 정부의 비전은 매우 참신하다. 그러나 동북아 패권경쟁은 아직 현실화되지 않고 한국이 그러한 추세를 막을 수 있는 힘이 없다면, 정부는 국가안보를 담보로 모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최선의 것을 달성할 수 있으면 최고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최악의 경우를 피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며, 외교에서 신중함이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정진영 (경희대교수.국제정치학 / 시민회의 운영위원) 출처 - 세계일보 2005. 4. 13 시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