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의 덕목은 '신중함' - 정진영
	2005-03-25
외교의 덕목은 '신중함' 노무현 대통령의 ‘한일 관계 관련 국민에게 드리는 글’은 그 내용과 형식에서 매우 파격적이다. 일본이 과거사와 독도 문제에 대해 ‘우리 국민이 수용할 만한 조치’를 내놓을 때까지 ‘외교 전쟁’도 불사하여 이 문제의 ‘뿌리를 뽑도록’ 하겠다는 초강경책을 내놓았다. 그리고 ‘역사의 대의’에 기초한 대일 외교 전쟁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와 혹시 발생할 수도 있는 경제적 어려움에 대한 국민들의 이해를 미리 구했다. 대통령의 비장한 각오가 느껴진다. 대통령은 이러한 중대 선언을 청와대 홈페이지에 올리는 형식으로 직접 국민에게 고했다. 대통령은 왜 이 시기에 대일 초강경책을 들고 나왔을까. 한국민 모두에게 그 답이 명백할 만한 이 질문을 제기하는 이유는 대통령의 지적처럼 이 문제가 ‘하루 이틀에 끝날’ 성질의 것이 아니고, 감정이 아니라 이성으로 차분하게 해결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대일 초강경책을 해석하는 데는 세 가지 가설이 가능하다. 첫째, 당위론이다. 이 문제는 원칙과 도덕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에 당연히 이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이다. 한일 관계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과거사와 독도 문제는 반드시 정리돼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한국민의 정서이다. 그러면 우리가 일본에 대해 쓸 수 있는 카드는 무엇인가. 일본이 스스로 우리가 원하는 바를 해주면 좋겠지만, 이러한 기대는 국제 관계에서는 공상이나 다름없다. 대통령의 글은 세 가지 수단을 제시하고 있다. 일본 정부에 대한 시정요구, 국제여론, 일본 국민 설득이 그것이다. 첫째와 셋째는 효력을 기대하기 어렵다. 둘째의 경우 일본의 유엔 안보리 진출을 우리가 막을 수 있는가와 직접 관련이 있다. 이것이 가능한 길은 한국의 반대를 내세워 중국이 거부권을 행사하는 경우이다. 따라서 이 카드의 효력은 중국에 달려 있다. 즉 중국은 거부권을 행사했을 경우에 올 파장과 동북아 질서의 변화를 고려하며 선택을 할 것인데, 여기에 우리가 얼마나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물론 우리에게 미칠 파장도 계산해서 행동해야 한다. 둘째, 국내 정치용이라는 가설이다. 일본은 노 대통령이 3·1절 기념사에서 일본의 배상을 언급할 때부터 대통령의 발언이 국내용이라고 평가했다. 즉 과거사 청산논쟁, 한일회담 문서 공개와 함께 대일 강경책이 대통령의 국내 정치적 목적을 위한 것이라는 시각이다. 대외관계의 위기를 국내 정치적 목적으로 활용하는 일이 매우 흔한 국제적 현실에서 보면 이러한 해석도 그럴 듯하다. 한국도 일본의 독도와 과거사 문제 제기를 일본 국내 정치의 수준에서 해석하곤 한다. 또 한 가지 가능한 국내 정치적 해석은 대일 강경책을 대통령이나 정부가 주도했다기보다 국민의 반일감정과 독도·과거사 문제가 부각되면서 여론에 떠밀려 어쩔수없이 택했다는 것이다. 셋째, 남북 정상회담 준비작업설이다. 북핵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6자회담이 교착상태에 빠져 있고, 설사 회담이 열리더라도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가 어려워 보이는 것이 작금의 상황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북핵 위기 해결의 돌파구는 남북 정상회담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대통령은 최근 한미동맹과 한일 관계를 약화시키는 일련의 발언들을 해오고 있다.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반대한다는 ‘노무현 독트린’과 한·미·일의 ‘남방삼각’에 더 이상 묶여 있지 않겠다는 발언이 대표적이다. 한미, 한일 관계의 위기는 자연스레 남북 정상회담의 필요성을 부각시킬 가능성이 크다. 외교에서는 신중함이 최고의 덕목이라고들 말한다. 국가안보를 담보로 섣부른 모험을 하다가는 낭패를 당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대외 관계는 중대한 갈림길에 서 있다. 한반도 주변 정세도 매우 불안정하다. 따질 건 따진다는 심정보다 차분히 국익을 계산하면서 행동할 때이다. 정진영 (경희대 교수·국제정치학 / 시민회의 운영위원) 출처 - 세계일보 2005. 3. 25 시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