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표현자유와 책임 논란 - 조희문
	2005-02-02
영화의 표현자유와 책임 논란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을 다룬 영화 ‘그때 그사람들’은 결국 스스로 ‘역사적인 영화’가 되고 말았다. 영화가 표현할 수 있는 ‘자유’의 범위와 책임을 법률적 판단으로 명시한 첫 번째 영화라는 기록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영화적 표현의 자유가 거의 무제한으로 보장되고 있는 현실에서 나타날 수 있는 개인 또는 집단의 권리나 명예훼손 문제를 어떻게 보호해야 하는가라는 점을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계기를 제공한 것이다. 제작단계에서부터 특정한 소재는 안된다거나 심의 과정에서 논란이 될 만한 부분을 미리 삭제하도록 하는 등의 검열적 행위로 인해 영화가 온전하게 상영되기 어려웠던 양상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모습이다. 지난 1996년 헌법재판소가 ‘행정력을 앞세운 사전 심의는 검열에 해당하며 위헌’이라고 결정한 이후 우리 사회에서 영화 표현에 대한 통제는 사라졌다. 상업적으로 상영하는 모든 영화는 관람등급을 받아야 하지만 소재나 표현과 관련한 삭제나 수정은 전혀 없다. 어떤 소재, 어떤 표현도 가능하다. 특정한 내용이나 표현이 개인이나 단체, 국가의 권리나 명예와 충돌하는 경우에는 개별 사안으로 법리적 판단과 그에 따른 책임을 지면 된다. 지금의 한국영화는 부당한 검열과 통제 속에서 허덕이는 사회적 약자가 아니라 어떤 소재라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고, 원하는 수준으로 표현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창조적 강자의 위치에 있는 것이다. 표현의 자유를 요구해야 하는 처지가 아니라 개인이나 단체의 권리, 명예 등을 어떻게 보호해야 하는지를 신중하게 생각해야 하는 입장으로 바뀐 것은 특히 주목할 만한 변화다. ‘그때 그사람들’은 영화 표현의 자유가 제한 없이 보장되고 있는 현실에서 그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를 법률적 판단으로 새로운 기준을 만든 셈이다. 영화의 표현에 반발해 논란을 벌인 사례는 여러 차례 있었지만 납득할 만한 결론에까지 이른 경우는 없었다. 시내버스 여차장들의 근무 행태와 인권 침해 문제를 다룬 ‘도시로 간 처녀’(1981)는 상영도중 관련자들의 집단 항의와 버스 회사 소속 운전자들의 시위 등으로 결국 간판을 내리고 말았다. 여승(女僧)의 구도 과정을 소재로 한 ‘비구니’(1984)란 영화는 제작 단계에서 불교계의 반발에 부닥쳤고, 결국 제작자는 영화 제작을 포기했다. 어느 여자 고등학교에서 일어나는 엽기적인 살인사건을 다룬 공포영화 ‘여고괴담’(1998)의 경우에는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가 영화의 내용에 문제가 있다면서 상영중지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고, 휴전선 내 공동경비구역에 근무하는 남북한 군인들이 은밀하게 접촉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사건을 묘사한 ‘공동경비구역JSA’(2000)에 대해서는 ‘JSA전우회’라는 단체가 상영 중지를 요구한 사례도 있다. 이들 사례의 공통점은 영화의 내용에 대해 관련자나 단체들이 자신들의 이미지와 명예를 훼손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집단적인 항의를 했다는 것이다. 표현의 자유와 개인의 권리가 충돌하는 경우였지만, 물리적 완력으로 옥신각신하거나 적당한 수준에서의 합의로 마무리됐을 뿐, 모두가 공유할 만한 기준을 만드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특정한 매체가 자신의 명예나 인격을 훼손하거나 부당하게 권리를 침해했다고 판단되면 시정을 요구하거나 최종적으로는 법적 다툼을 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정당한 방어행위이지 결코 비난받고 매도당할 일은 아니다. ‘표현의 자유’가 존중돼야 한다면 ‘자신을 보호할 권리’ 역시 존중돼야 한다. 판결 결과에 대해 영화를 만든 측이나 이의를 제기한 측이나 모두 기대와 다른 결과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표현의 자유와 개인의 권리가 어떻게 균형과 조화를 이뤄야 하는지에 대한 중요한 선례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의미는 크다. 영화적 수준이 어떻든, 흥행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든 ‘그때 그사람들’은 한국영화의 사회적 영역을 넓히는 데 기여한 경우로 남게 됐기 때문이다. 조희문 (상명대 교수, 영화평론가 / 시민회의 운영위원) 출처 - 문화일보 2005. 2. 2 포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