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파행 부르는 ‘로또 수능’ - 남승희
2004-12-20
교육파행 부르는 ‘로또 수능’ 자녀의 수능성적표를 받아든 고3 학부모들은 “도대체 어쩌란 말이냐”며 분통을 터뜨린다. 12년 동안 나름대로 자녀 교육에 최선을 다했는데, 이렇게 난감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일부 학부모들은 올 수능을 “누구도 만족시키지 않으면서 누구에게도 유리하지 않은 제도”라고 규정짓기까지 한다. 적성은커녕 표준점수와 백분율을 놓고 갬블링(gambling)하듯 모든 가능성을 조합해 보다가 너무 복잡해서 결국 다양한 선택을 포기하게 만드는 제도라는 것이다. 점수로 서열화하는 것을 막자면서 시행한 제도가 오히려 서열을 공고히하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학부모들의 주장은 이번 정책이 얼마나 탁상공론으로 수립됐는지를 역설적으로 말해준다. 선택과목별 난이도 조정에 실패한 탓에 한 문제 틀리고도 3등급이 추락해 인생의 진로가 바뀌게 된 경우는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변별력 잃은 시험 결과로 능력을 평가받아야 하는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 불공정하고 비합리적인 ‘게임’은 없다는 것이다. 입시철마다 그냥 넘어간 해가 없었다. 그러나 올해의 경우는 학부모의 권리를 침해하고, 대학의 자율성을 훼손하며, 정부의 권한을 남용한 사례로 규정지어야 할 것 같다. 수능시험이 학력고사가 아닌 바에야 점수로 우열을 가리는 수단일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서 변별력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학부모와 대학이 엄청난 혼란과 불안에 휩싸인 것은 바로 ‘정보의 모호성’ 때문이다. 고등학교와 대학, 그리고 학부모는 정부가 갖고 있는 학생의 정보에 대해 알 권리가 있다. 동시에 정부는 이를 정확하게 설명할 의무가 있다. 정부가 수능 원점수를 끌어안고 현장의 혼란을 부추기는 것이 대학의 서열화를 막고 특성과 적성에 맞게 대학 진학을 유도한다는 정책과는 무관한 것이다. 학생들이 적성과 특성에 맞는 학교로 진학하도록 정부가 유도하기 위해서는 행정·재정적 지원을 통해 학교의 질을 평준화하고 학교의 형태를 다양화·특성화하는 일에 매진해야 한다. ‘고등학교 평준화’ 제도는 모든 고등학교가 교육 여건에서 지역 간, 학교 간 격차가 없이 평준화돼 있음을 의미하는 정책이다. 이를 전제로 학생이나 학부모들이 학교선택권을 제한받는 것이다. 모든 학교의 교육시설이나 교육여건, 학업성취도, 교사당 학생수, 잠재적 교육과정 등의 평준화가 전제돼 있어야 가능한 제도다. 정부는 정책적 개입을 통해 고교 간 교육의 질에 격차가 없도록 해야 하고 이를 전제로 대학이 내신 중심으로 학생을 선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정부의 역할이고 정부의 책무다. 그런데 정부는 평준화 정책의 원칙에 위배된다는 논리로 고교의 정보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는 고교의 학업성취도를 비롯해서 교사에 관한 정보까지 공개하고 있고, ‘평등 교육’의 대명사인 프랑스에서조차 모든 고교의 학업성취도를 12년째 공개하고 있다. 그런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PISA 2003 보고서’도 지적했듯이, 우리나라의 고교 간 격차가 분명히 존재하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교정한 결과는 제시되지 않았다. 이렇게 고교 학습과정의 학업성취도가 신뢰를 잃은 채 수능 ‘한 탕’만으로 가능한 대입 제도라면 앞으로도 내신 부풀리기나 수능 부정의 유혹으로부터 어느 누가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인가? 얼마 전 일부 대학의 ‘고교등급제’파동도 그렇고 이번 수능도 그렇다. ‘요행’이나 ‘사행심’을 부추기는 제도적 허점이 보인다는 것이다. 경쟁적으로 내신 부풀리기를 감행한 고교, 별 문제의식 없이 부정행위에 가담한 학생, 이에 한 술 더 떠 뒤에서 돈 들고 뛰어다니며 부정을 부추긴 학부모, 이제 정부는 이 ‘질곡의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 고교 졸업 학력은 정부가 보증해야 한다. 따라서 학력고사 실시는 정부의 몫이다. 정부는 학부모와 학생, 고교와 대학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는 장만 마련해주면 된다. 감당할 수 없는 일을 하겠다고 붙들고 있는 것은 무책임한 태도다. 입시에 쏟는 예산과 인력, 시간과 정성을 ‘더 좋은 학교’ 만드는 일에 쏟는 것이 바로 정부가 할 일이다. 수능을 학력고사화하고 학생선발권을 대학에 맡기자. 그리고 정부는 그것이 투명하고 공정하게 진행되도록 지원하고 관리하자. 그것이 옳은 방향이다. 남승희 (명지전문대 교육학 교수 / 시민회의 운영위원) 출처 - 문화일보 2004. 12. 16 포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