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反개혁 논쟁 뛰어넘자 - 박성조
	2004-12-06
개혁-反개혁 논쟁 뛰어넘자 우리나라는 지금 개혁의 한가운데 있는 듯하다. 4대 개혁, 7대 개혁입법 하면서 국회가 시간을 허비한 게 벌써 4개월째다. 필자는 사상 유례없는 개혁, 반개혁의 비생산적 논쟁을 지켜보면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몇 가지 점을 지적한다. 독일의 카첸슈타인(Katzenstein) 교수는 수년 전 독일 정부의 정책결정 범위가 너무나 국내 정치 차원에도 제한되고 있는 현상을 두고 ‘반주권 국가(semi-sovereign state)’로 개념화한 적이 있다. 세계화 추세, 특히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이후 준비되지 않은 세계화 속에서 금융주권·산업주권, 심지어 기술주권마저 상실될 위기에 있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독일 통일 후, 동독 소재의 약 1만1000개 국영기업이 민영화될 때 공개 입찰과 관계없이 ‘숨겨진 서열’에 의해 민영화가 추진됐다. 이른바 ‘필레’(가장 수익성이 높은 알짜 기업)는 독일인에게, 그 다음은 유럽인에게, 또 그 다음에는 미국인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기업은 아시아인에게 할당하는 순서에 따라 매각됐다. ‘나머지’ 기업은 헐값으로 인수할 수는 있었으나, 인수를 위해서는 면밀한 투자계획, 고용 확대 계획 등 까다로운 요구 사항을 충족시켜야만 했다. 삼성의 동베를린 WF 인수 조건도 마찬가지였다. 독일인의 민영화 전략은 교묘했다. 즉, 인수되는 기업의 ‘연구개발부’가 장래성이 있다고 판단됐을 때, 이 부서만을 분리(MBO: management buy-out)시켜 독립회사를 만들고 정부는 보조금을 통해 지원했던 것이다. 미국과 EU는 독일의 이러한 정책은 ‘공정거래’에 위배된다고 반박했으나 독일 정부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몇 년 전 대우가 프랑스 톰슨사의 일부를, 삼성이 독일의 자동차 오디오 제조 회사 베커를 인수하려 했을 때, 채권은행과 여론, 심지어 노조를 동원하여 자국이익을 관철시킴으로써 이들 회사의 인수는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유럽연합(EU)도 여기에 발맞추고 있다. 한때, 일본 후지쓰사가 영국의 ICI사를 인수했을 때, 이 회사는 그 동안 EU로부터 받아온 보조금을 전부 반환해야 했고 기업인연합회로부터도 제명됐다. 유럽, 특히 독일에서는 적대적 인수가 거의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상장기업이라도 대주주가 가족인 BMW, 대주주가 기관투자가인 폴크스바겐이 대표적인 예다. 또한, 가족경영을 하면서 상장하지 않는 기업들도 적지 않은데, 그 대표적인 예가 미국의 랜덤하우스(Random House)를 인수한 베르텔스만(Bertelsmann)이다. 흥미로운 점은, 최근 독일의 한 연구에 따르면, 이러한 가족경영 회사가 ‘주주 자본주의’ 경영 또는 ‘종업원자본주의’ 경영 방식을 채택하고 있는 기업보다 안정된 수익률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따라서, 적대적 인수·합병(M&A)이 자유로워야 기업의 생산성이 제고된다는 주장도 하나의 가설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이러한 M&A 방어정책이 항상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100년 이상의 전통을 자랑하고 독일의 ‘민족자본의 상징’이라고 간주돼 온 마네스만(Mannesmann)사는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의 직간접적인 지원정책에도 불구하고 경영난을 극복하지 못하고 영국의 보다폰(Vodafone)사에 인수돼 버렸다. 이와 같이 일국의 ‘상징’이었던 기업들이 부실 혹은 수익성을 이유로 하루아침에 타국 기업에 넘어가는 사례는 비일비재하다. 자동차 회사인 영국의 로버(BMW에 인수됐다가 영국인들에게 재인수됨), 스웨덴의 볼보, 미국의 크라이슬러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처럼 글로벌화된 세계 경제 속에서 기업이 M&A 당하다는 것은 비일비재하며 특별한 현상도 아니다. 그러나 간과해서는 안 될 점은 한 나라가 세계화 속에서 산업주권·기술주권·금융주권을 지키고 능동적인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국의 글로벌 플레이어(Global Player)가 필요하고, 정부는 이를 위해 직간접으로 지원해야 한다는 점이다. 또한, 개별 행위자의 ‘지식자본’도 철저히 보호돼야 한다. 빌 클린턴 대통령 재임시 가장 중요한 경제 이슈 가운데 하나가 ‘라이시(Reich)와 타이슨(Tyson) 간의 논쟁’이었는데, 이는 외국인 투자에 의한 고용은 환영하지만 외국인이 미국의 ‘지식자본’을 잠식하는 것은 재고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금기 영역으로 밀어 넣었다. 지금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만든 ‘굴레’ 속에서 헤매고 있다. 오늘날 모든 선진국이 세계화 경쟁에서 ‘자기 이익과 자신의 정체성을 보존·발전’시키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고 있다. 우리 국회도 세계화 경쟁 속에서 우리나라의 대응이 과연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생각하면서 공정거래법 등 경제 관련 법안을 검토해야 한다. 개혁이냐 반개혁이냐가 아니라 우리 민족, 우리 기업의 생존·번영이냐, 몰락이냐 하는 대국적인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교각살우의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기를 당부한다. 박성조 (베를린자유대 교수, 서울대 초빙교수 / 시민회의 고문) 출처 - 문화일보 2004. 12. 6 포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