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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미국 양국간의 동맹관계 재조정 논의가 진행되면서 한국의 방위책임이 확대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이 한국 정부에 자국의 신형 무기체계 구매를 요청하고 있어 주목되고 있다. 얼마 전 한국을 방문했던 폴 월포비츠 미 국방성 부장관과 리언 라포트 주한미군 사령관이 잇따라 한국의 국방비 증액을 촉구하는 발언을 했으며, 특히 패트리어트 지대공 미사일, AH-64D 아파치 롱보우 공격 헬리콥터 등의 특정 무기체계를 언급하면서 한국이 이들 무기를 구매할 것을 요청했다는 점은 적지 않은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최근 국방부가 제출한 내년도 국방예산안에 SAM-X(차기 방공유도무기)사업 착수예산 1천 3백억원이 포함됐다는 것은 이러한 우려를 뒷받침하고 있다.
미국측은 향후 3년 동안 110억 달러 이상을 투입하여 주한미군의 전력강화를 추구하는 것에 따라 미군과의 연합전력 체제를 이루고 있는 한국군의 전력강화가 병행되어야 하며, 한반도 방위에서 한국의 역할 증대를 실현한다는 차원에서도 한국군의 국방비 증액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한국 역시 노무현 정부 출범 직후부터 자주국방 실현을 위한 국방비 증액 의사를 확인해왔으며, IMF 외환위기 이후 지난 수년 동안 국방비가 일반 국가들의 평균수준에도 못 미치는 GDP(국내총생산) 대비 2.7% 정도에 머물러오면서 국방에 필수적인 전력강화에 차질을 빚어왔던 입장에서 일정수준의 국방비 증액은 필수적이다. 국방부는 지난해보다 28.3% 증액된 총 22조 3천 4백억원(GDP 대비 3.2%)의 국방예산안을 제출했는데, 어떤 의미에서 볼 때 이것은 증액이라기보다 정상적 수준으로의 복귀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단순한 미국의 무기체계 구매만을 위한 것으로 국한되어서는 안된다.
한국이 가장 우선적으로 획득해야 하는 무기체계는 전략수준, 즉 상대 국가의 의지에 직접 영향을 주어 군사적 위협 자체를 원천적으로 예방할 수 있는 차원의 능력을 갖춘 무기체계들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조기경보기와 정찰기 등 정보능력, 그리고 탄도·순항 미사일 등 장거리 전력투사 능력을 갖춘 무기체계들을 의미한다. 한국은 지금까지 이러한 능력들이 부족했기 때문에 국가안보의 상당부분을 미국과의 동맹을 통해 해결해 왔던 것이며, 이는 북한 핵문제를 비롯한 안보상의 중요 위협에 대응하는데 한국의 입지를 좁히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상 자국 운명 결정이라는 사활적 국익의 향방을 타국의 영향권에 맡긴다는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상황이 계속될 것이며, 그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들에게 돌아올 수밖에 없다. 한국이 전략수준의 무기체계를 우선적으로 획득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현재 미국이 한국에 구매를 제안했다는 패트리어트 지대공 미사일, 아파치 롱보우 공격 헬리콥터 역시 도입이 필요한 무기체계라는 점은 인정된다. 기존의 나이키 허큘리스 지대공 미사일과 AH-1 코브라 공격 헬리콥터가 이미 노후화되어 그 역할 수행에 어려움이 따르고 있으며, 휴전선 전방에 밀집된 북한의 공군 및 탄도미사일, 그리고 탱크 전력의 위협은 결코 무시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에서 지적된 전략수준의 무기체계 도입과 비교할 때 그 우선순위는 낮을 수밖에 없다. 패트리어트와 아파치 롱보우 등의 도입은 그 다음 순위 상으로 이루어져도 충분하다. 만일 이들이 전략수준의 무기체계보다 우선적으로 도입된다면 정부의 국방비 증액 시도는 단순한 미국제 무기체계 구매로 전락할 것이며, 정부는 방위력 강화에 필요한 국민들의 지지를 얻지 못할 것이다.
국방의 자립을 이루지 못하여 자국의 운명을 타국과의 협력 여부에 의존하는 일이 더 이상 지속되어서는 안된다. 오랜 시간과 막대한 비용이 요구되는 일이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다. 이러한 점에서 노무현 정부가 출범 직후부터 국방의 자립에 대한 의지를 재확인하고 있다는 점은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러한 노력이 국민적인 지지와 함께 이루어지기 위해서 무기체계 도입을 비롯한 정부의 방위력 강화정책은 반드시 전략적 우선순위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 정부의 자발적인 국방자립 의지에 따른 신형 무기체계 도입이 타국의 강요에 따른 것으로 비춰지는 것은 아무에게도 이익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국방당국은 자체적인 구조개혁과 효율성 제고를 통하여 증액된 국방예산이 방위력을 강화하는데 꼭 필요한 부분에 쓰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시민회의는 정부가 납세자인 국민들의 신뢰 속에서 국방의 자립을 이룰 수 있도록 성의 있는 노력을 기울일 것을 촉구한다.
바른사회를 위한 시민회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