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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핵개발을 둘러싼 한반도에서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주목할만한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2003년 4월 12일 북한이 외무성 대변인의 발표를 통해 “만일 미국이 핵 문제의 해결을 위해 대조선 정책을 대담하게 전환할 용의가 있다면 우리는 대화의 형식에 크게 구애되지 않을 것”이라고 밝힌 것이다. 비록 당사자로서 한국의 입장을 부인하려는 태도는 여전했지만, 적어도 그동안 미국과의 양자 회담만을 고집해왔던 종전의 태도와 비교할 때 한층 유연해진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과 미국 역시 이러한 북한의 태도변화에 대해 다소 신중하면서도 긍정적인 기대를 표명했다.
북한의 이와 같은 태도변화의 이면에는 역시 제2차 걸프전쟁과의 연관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전쟁이 점차 종전 국면에 접어들면서 그동안 미루어져왔던 북한 핵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논의가 본격화될 것임이 분명해졌으며, 이에 따라 지난 4월 9일에는 북한 핵문제에 대한 논의가 UN 안전보장이사회에서는 처음 개최된 바 있다. 또한 제2차 걸프전쟁이 예상보다 빨리 미영 연합군의 승리로 기울어지면서 북한은 그 공백상태를 악용해 자신들의 군사적 능력으로 한국과 미국에 대한 위협을 가할 기회를 잃었으며, 유사시 자신들에 대한 무력사용 가능성까지 공언하는 미국 부시 행정부 내 강성론자들의 입지가 강해진 점에 큰 부담을 느꼈을 것이다. 여기에 그동안 미국이 거듭 강조해 온 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한 외교적 틀로서 다자간 대화방식에 한국과 중국 그리고 러시아까지 수용의사를 밝힌 점 역시 북한의 이번 태도에 상당 부분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일단 북한의 이번 태도가 이전에 비해서 긍정적이기는 하지만, 이것만으로 북한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 가능성에 대한 성급한 낙관은 이르다. 북한이 다자간 대화 참여의 조건으로 “미국의 적대시 정책 폐기”를 요구한 것은 현 위기상황에서의 당사자를 미국으로만 한정시키는 기존 입장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이로 인해 이번 핵위기를 비롯해서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필수적인 한국에 대한 안보상의 위협해소에 북한이 여전히 소극적이라는 우려를 떨치기 어렵게 되었다. 다시 말해 한국을 평화공존이 아닌 정복과 타도의 대상으로 규정하고 있는 현재 상황에서 북한이 ‘미국의 적대시 정책 폐기’, ‘체제보장’을 요구하는 것은 국내외 일각의 기대와는 달리 그들 전체주의 정권의 한반도 장악을 미국과 외부세계가 인정하라는 의미라고 볼 수밖에 없다.
만일 북한이 요구하는 ‘미국의 적대시 정책 폐기’와 ‘체제보장’ 등이 기존의 한반도 장악노선을 전제로 하지 않는 문자 그대로의 내용이라면, 북한은 그 점에 대해서 안심해도 좋다. 한국은 더 이상 과거와 같은 승공, 멸공, 북진, 흡수통일을 지향하지 않는다. 이미 한국은 전임 김대중 정부를 비롯해서 수년 동안 북한이 자발적으로 변화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해왔으며, 이는 북한과의 평화번영정책을 추구하는 노무현 정부 역시 마찬가지다. 북한을 ‘악의 축으로 지목하고 있는 미국조차 이라크와의 전쟁 직후 곧바로 북한에 군사력을 포함한 강경책을 쓸 것이라는 일각의 우려와는 달리, 이라크와 북한 사이의 차이점을 강조하면서 외교적 수단의 우선순위를 강조하고 있다. 부시 미국 대통령 본인은 물론 부시 행정부 내부에서 강성론자로 알려진 이들까지 그러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미국 내에서 간혹 북한 핵문제에 대한 무력사용 주장이 거론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평화적 해결수단이 실패하거나 북한이 현재의 안보상 위기를 방관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시키는 문제를 조장할 경우를 전제로 한 것일 뿐이다. 이러한 미국 내 일각의 경고가 실체화될지의 여부는 전적으로 북한의 선택에 달려있다.
한국과 미국 그리고 국제사회가 원하는 것은 북한의 패망이나 굴복이 아니다. 단지 북한이 한국과 동북아시아 그리고 그들 스스로의 생존까지 위협하는 시대착오적인 한반도 장악노선에 따른 군사적 위협을 중단할 것을 요구할 뿐이다. 이를 수용할 경우 북한에 경제적 재건과 국제사회로의 복귀 등 체제생존과 번영을 위한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는 보장이 벌써 여러 차례 나왔다. 북한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문자 그대로의 ‘체제보장’이나 ‘적대시 정책의 폐기’라면 이러한 외부세계의 요구를 거부할 이유가 전혀 없다. 만일 이를 거부한다면 그것은 북한의 진정한 의도가 평화와 생존이 아닌 정복과 위협에 있다는 주장을 입증해줄 뿐이며, 결과적으로 자신들의 목을 죄는 결과만을 가져올 것이다.
지금 북한이 처한 상황은 과거와 판이하게 다르다. 제2차 걸프전쟁이 미영 연합군의 승리로 기울어지면서 대량살상무기를 비롯한 군사적 위협을 고수하는 독재 정권이 설 자리가 더 이상 없다는 점이 분명해졌으며, 그동안 소극적이었던 중국과 러시아까지 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한 다자간 대화에 동조하고 있다. 이는 현재의 위기가 결코 미국과 북한 양측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닌 한국과 동북아시아 그리고 세계 전체의 안전이 걸린 사안이며, 따라서 한국을 비롯한 모든 이해당사자가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참여해야 한다는 점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북한은 더 이상 주저하지 말고 현재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다자간 대화에 나서야 한다. 그리하여 자신들이 진정으로 평화를 원하며, 이를 위해 한국과 외부세계의 우려를 해소하기 위한 행동에 나설 준비가 되어있음을 증명해야 한다. 이제 북한이 외부세계의 선의에 부응할 차례다.
바른사회를 위한 시민회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