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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걸프전쟁의 발발로 사람들의 눈길이 대부분 이라크를 비롯한 중동지역에 쏠려 있지만, 한국의 입장에서 볼 때 그보다 더 시급히 다루어야 할 중요한 이슈가 있다. 지난 3월 18일 미 국방성의 한 고위관계자가 지난 50년간 계속되어왔던 주한미군의 인계철선(tripwire) 역할, 즉 미 지상군(제2사단) 휴전선 전방배치를 더 이상 지속할 뜻이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는 회견에서 “주한미군의 역할을 인계철선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미국인이 먼저 죽지 않는 한 한국군이 한국을 방어할 수 없다는 의미이며, 세계적 수준의 전투력을 갖춘 한국군의 능력을 생각할 때 이는 매우 불공정한 말이다”라고 주장했다. 또한 같은 날 미 국방성의 제프 데이비스 대변인은 “한미 양국은 9월쯤 서울 용산 미8군 사령부와 경기 북부의 미 제2사단의 한강 이남 배치 등을 포함한 주한미군 재배치에 관한 계획을 발표할 예정”이라고 밝히면서, “이 계획에는 3만 7천여명의 주한미군 중 7천명 가량을 줄일 계획도 포함되어 있다”라고 덧붙였다.
미국은 자신들의 이러한 입장이 세계 모든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자국군 부대 배치의 정기적인 재검토 차원일 뿐 지난 반세기동안 지속되어온 한국에 대한 안보공약을 약화시킬 의도가 없으며, 이러한 조치들 역시 어디까지나 한국의 요청과 협의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이러한 미국의 태도에 불안감과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
주한미군이 한국의 안보와 북한에 대한 전쟁억지력에서 차지하는 의미는 3만 7천여명의 규모보다는 휴전선 부근에 집중된 전방배치 그 자체에 있는 것이다. 현재의 한미 상호방위조약에 따르면 양국 가운데 어느 한쪽이 침략을 받았을 경우 이에 대한 군사적 지원이 ‘각자의 헌법상 수속에 따라’ 이루어진다고 규정되어있다. 이것은 미국과 일본 및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 가맹국간의 동맹조약이 유사시 미국의 ‘자동개입’을 규정하고 있다는 점과 비교할 때 강제성이 떨어지며, 한국에 대한 미국의 안보공약 준수여부에 대한 신빙성 그리고 더 나아가 북한에 대한 전쟁억지력을 의심스럽게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한국의 의구심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 바로 주한미군의 전방배치를 통한 소위 인계철선 역할이다. 다시 말해서 주한미군을 전방에 집중배치할 경우, 북한이 선제기습을 통한 남침에 유리하도록 휴전선 전방에 집중배치한 장거리야포 등의 공격에 피해가 불가피할 것이다. 이 경우 유사시 미국은 한국에 대한 전면적 군사개입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리하여 한반도에서 무력충돌이 발생할 경우 반드시 미국이 할 것임을 북한에 확신시켜 전쟁억지력을 보장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이 다른 시점도 아닌 북한의 핵개발 위협이 실체화되고 있는 지금 이 시점에서 주한미군의 인계철선 역할 포기를 거론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첫째, 주한미군의 전진배치가 북한에 대한 전쟁억지 역할을 할 것이라는 기존의 전제와는 달리, 오히려 북한의 기습공격에 취약성을 노출시킴에 따라 유사시 북한에 대한 군사적 대응에 유연하게 대처하기 어렵게 되어 북한이 한국과 미국의 의지를 압박할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한다는 문제가 있을 것이다. 지난 2001년 취임초기부터 지상병력의 전방배치보다 폭격기와 항공모함 등 원거리 신속배치군 위주로의 전력개편과 유사시 적성국가에 대한 선제공격전략을 천명해왔던 부시 행정부의 입장에서 볼 때 주한미군 역시 개편대상에 포함될 이유는 충분할 것이다. 또한 지난해 발생한 미군 장갑차 여중생 압사사고에 관련된 병사들의 무죄평결에 대한 한국내의 범국민적 항의를 비롯한 한국 사회 내부의 반미감정에 대한 반발로 미국 사회 일각에서 주한미군 철수 등이 거론되자, 이를 무마하기 위한 하나의 대안으로 인계철선 역할을 포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새로 출범한 노무현 정부와 ‘수평적 한미관계’ 요구를 미국에 대한 반감으로 의심하는 부시 행정부가 노무현 정부의 의지를 시험하기 위한 목적을 가졌을 수도 있다.
이유야 어떻든 만일 주한미군의 전면적인 후방배치가 이루어져 기존의 인계철선 역할에 변화가 생긴다면 이는 분명 한국의 안보에 부정적 영향을 줄 것이 분명하다. 아직 북한의 국력핵심에 대한 장거리 타격능력이나 북한 전역에 대한 정보전 능력 등 소위 전략능력을 독자적으로 확보하지 못하고 있는 한국의 입장에서 주한미군의 후방배치에 따른 인계철선 역할 소멸은 북한으로 하여금 한반도에서 군사적 충돌이 일어나도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오판하게끔 할 위험이 있으며, 이는 북한에 대한 전쟁억지력에 심각한 지장을 초래할 것이다. 특히 북한의 핵개발 위협이 언제든 실체화된 위험으로 다가올 수 있는 현재 상황에서는 더욱 그러한 위험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주한미군의 인계철선 역할 포기에 따른 파장은 한반도 차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중국과 일본간의 역내패권경쟁 가능성이 상존하고 있는 동북아시아에서 균형자로서의 미국의 역할에 대한 의구심을 증폭시켜, 이미 군사대국으로 복귀한 일본이 미국의 공백을 채운다는 명목으로 더욱 노골적으로 군비증강을 추구함에 따라 동북아 전반의 군비경쟁을 심화시킬 우려도 있다. 이 모든 상황이 우리의 국익에 심대한 위협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 정부는 곧 있게 될 미국과의 본격적인 양국간 동맹관계 재조정 논의에서 다음과 같은 점을 관철시켜야 할 것이다. 먼저 주한미군의 후방배치가 유사시 북한에 대한 군사적 대응의 유연성을 높이기 위한 방책의 일환임은 인정하더라도, 최소한의 병력과 주요사령부만큼은 한강 이북에 잔존시켜 북한이 오판할 수 있는 여지를 주지 말도록 해야 할 것이다. 또한 만일 주한미군의 후방배치에 대한 미국의 의지가 분명할 경우, 이후에도 한국에 대한 미국의 안보공약을 분명히 하기 위해 기존 한미 상호방위조약상의 군사적 지원의무 조항을 NATO 및 일본과의 동맹과 같은 ‘자동개입’으로 개정할 것을 요구해야 한다. 이것은 한국의 국력향상과 함께 한미 양국간의 동맹을 한 차원 높게 강화시킨다는 양국간 목표에도 부합될 것이다. 그리고 주한미군의 인계철선 역할 포기가 한반도는 물론 동북아시아에서의 미국의 역할에 대한 불신을 낳고 동북아 전체의 불안정을 초래하는 등 미국의 국익에도 부합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지금은 북한의 핵개발 위협에 따른 전쟁위험 방지와 한반도 평화유지를 위해 그 어느 때보다 한미 양국간의 공고한 동맹체제를 필요로 한다. 만일 양국간의 관계가 갈등과 분열을 보인다면 그로 인해 이익을 보는 세력은 한반도 전체를 장악하려는 북한 전체주의 정권뿐이다. 따라서 주한미군의 전력조정 및 재배치는 어디까지나 한반도에서의 전쟁억지력을 보다 강화시키거나 효과적으로 수행될 수 있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주한미군의 인계철선 역할 유지에 대한 문제도 이런 맥락에서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바른사회를 위한 시민회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