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활동 > 논평·성명
> 활동 > 논평·성명
2003년 3월 7일, 북한은 관영 조선중앙통신의 ‘변함없는 대응방식’이란 논평을 통해서 자신들이 조장하고 있는 핵문제에 대한 미국 등 외부세계의 시정요구에 앞으로도 초강경 으로 대응해 나갈 것임을 공식 천명했다. 이 논평에서 북한은 특히 "적들의 강경에 초강경으로 맞서는 것은 변함 없는 대응방식"이라고 밝혔으며, 지난 1968년 푸에블로호 납치사건 당시의 미국과의 전쟁불사 위협, 그리고 1993년 당시 준전시 상태의 선포와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비롯한 일련의 초강경 대응을 통해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얻어냈다면서 “이는 자주적 초강경 대응방식의 위력과 정당성, 생활력의 과시로 된다"라고 주장했다.
많은 사람들이 북한의 이러한 태도를 곧잘 비이성적인 행위로 규정한다. 왜냐하면 외견상의 국력으로 볼 때, 북한이 한국이나 미국 등 외부세계와 도저히 겨룰 형편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이러한 북한의 극단적 태도가 무모하게 보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이 이 이러한 행태를 보이는 것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북한은 비록 총량적인 국력면에서는 한국과 미국 등에 비교될 수가 없지만, 적어도 그들이 소중히 여기는 것을 위협할 수 있는 능력은 충분히 가지고 있다. 휴전선 전방에 집중배치된 통상전력 그리고 핵 및 생화학무기와 같은 대량살상무기의 탄두장착이 가능한 장거리미사일(노동, 대포동) 등은 한국, 일본 그리고 미국 등에 감당하기 어려운 인적, 물적 손실을 입힐 수 있는 위협적인 수단이다. 따라서 외부의 군사적 위협으로부터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는 것을 사활적 국가이익으로 규정하고 있는 이들 민주주의 국가들로서는 북한의 위협에 섣불리 행동하기에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의 이러한 극단적 행태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이들 전체주의 정권 스스로가 규정하고 있는 국가목표에서 찾아볼 수 있다. 북한은 지난 1948년 9월 9일 정권수립 이래 줄곧 자신들 스스로를 한민족 전체의 유일정통 정부로 규정하고 있으며, 그들에게 대한민국이란 존재는 단지 외부세력인 미국의 점령하에 있는 괴뢰정권으로서 자신들이 해방시켜야 할 ‘정복의 대상’에 불과할 뿐이다. 또한 북한은 1972년 12월의 제1차 개헌 이래 주민 전체를 ‘올바른 지도를 수행하는 뇌수(腦髓)’ 즉, 수령의 지도에 따라 움직이는 부속물로 규정하는 주체사상을 유일 지도이념으로 채택하였으며, 이때부터 북한은 일반적인 인민민주주의 체제하에서 김일성-김정일 일가의 절대적 기득권을 보장하는 전체주의 체제로 변질되어 버린 것이다. 이러한 기형적인 독재체제를 정당화하기 위한 구실이 바로 소위 조선반도 남반부의 해방, 즉 한반도 전체를 김일성-김정일 일가를 정점으로 하는 전체주의 정권이 장악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북한 전체주의 정권은 지난 반세기 동안 자신들 스스로를 외세와 그 괴뢰에 맞서는 민족해방세력으로 규정해왔으며, 이를 통해 대내적으로는 기형적이고 폭압적인 독재체제를 합리화시켜왔으며, 대외적으로는 무모하게 보일 수밖에 없는 극단적 위기조장을 서슴지 않아 왔던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자주’는 자신들의 한반도 장악을 반대하는 세력에 대한 적대노선을 의미하며, ‘체제보장’은 자신들의 한반도 장악에 미국과 외부세계가 방해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민족공조?대단결’이란 자신들이 주도하는 한반도 장악에 한국이 추종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 10여년 동안 계속된 급격한 국력퇴보 그리고 한국 등 외부세계와의 체제경쟁이 사실상의 실패로 드러나면서 북한은 심각한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다. 이제 더 이상 자신들 혼자만의 역량으로는 한반도 장악은 고사하고 스스로의 생존조차 확신할 수 없게 되었으며, 오히려 한국에 의한 흡수통일이나 자체붕괴까지 우려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음을 북한 스스로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외부세계와의 교류확대와 자체개혁 그리고 한국과의 평화공존 제도화가 필수적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줄곧 자신들을 민족 유일의 정통정부로 규정하면서 한반도 전체의 장악을 존재이유로 삼아왔던 북한 전체주의 정권의 입장에서는 이 같은 변화는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셈이 되는 것이다. 지난 50년 동안 절대적 기득권을 누려왔던 북한 정권의 입장에서 이는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일 것이며, 때문에 대내적으로는 자신들의 존재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그리고 대외적으로는 자신들이 무시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부각시키려는 목적으로 의도적인 위기조장을 줄곧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북한의 이러한 위기조장에 의한 ‘그럭저럭 넘어가기(Muddling through)'에 대해서 외부세계는 점차 인내의 한계를 느끼고 있다. 따라서 북한이 이번에도 초강경대응을 통한 위협으로 외부세계의 양보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치명적 착각임이 드러날 것이다. 1994년 제네바 핵합의 이후 북한의 자발적 변화 가능성에 기대를 걸었던 외부세계였지만, 이제 북한의 위협능력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진 현 시점에서는 더 이상 그때와 같은 관용을 베풀 의사가 사실상 없다. 예컨대 북한이 만일 핵연료봉을 재처리하여 핵무장에 성공할지라도 이는 일본과 한국 등의 대응적 핵무장을 불러올 것이며, 혹은 핵연료봉의 재처리 시도만으로도 지금까지 북한의 입장에 동조적이던 중국과 러시아까지 북한에 대한 고립화에 동참하는 구실이 될 것이기 때문에 북한으로서는 아무런 이득도 없이 스스로의 입지만 좁히는 결과만 초래하게 될 것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북한은 이제 자승자박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야 한다. 현실적으로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한반도 장악이라는 시대착오적 목표에 매달려 지금처럼 핵개발 위협과 같은 무모한 강경수만 고집할 경우 결국에는 스스로의 파국만을 가져올 뿐이다. 외부세계는 더 이상 지난 10년 전과 같이 북한의 문제조장을 묵과해줄 의사가 없다. 강경론자 혹은 온건론자의 차이는 단지 북한의 자발적 변화가능성과 수단에 대한 입장에서의 차이일 뿐이지,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위해서는 북한의 근본적 변화가 필요하다는 점에서는 전혀 다를 것이 없다. 그 누구도 북한이 소수 독재정권만의 절대적 기득권을 위해 한반도에서의 군사적 위협과 갈등을 지속하면서 7천만 민족의 운명을 담보로 도박을 벌이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사실을 북한 전체주의 정권은 똑바로 인식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변화를 통한 생존이냐 아니면 자승자박에 의한 파멸이냐를 결정해야 할 시간도 이제 별로 남지 않았다는 사실 또한 명심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바른사회를 위한 시민회의